[그땐 그랬지: 옛날특집④보] "탕탕!-오라이~" 그시절 버스 안내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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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그랬지: 옛날특집④보] "탕탕!-오라이~" 그시절 버스 안내양
한창 엄마에게 응석부릴 '철없는, 다부진 소녀'
  • 김민호 기자
  • 승인 2020.11.01 10: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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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탕!-오라이~"하면 버스가 출발,
"탕!-오라이~"하면 버스를 멈추라는 버스 안내양의 목소리.
그땐 그랬지...

[공공투데이 서울=김민호 기자] 버스 안내양 하면, "버스 옆구리를 ‘탕탕!’ 치면서 ‘오라이~’ 하고 외치는 모습"을 떠올린다. 이는 버스 안내양을 표현하는 하나의 상징이 될만큼 뇌속에 틀어 박혔던 엣추억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61년 버스 안내양 제도가 정식 도입돼, 1980년대 들어와 가장 활발했던 버스 안내양은 대부분 지방에서 대도시로 돈을 벌기 위해 올라온 20대 초반의 꽃다운 나이였다. 아직 청바지가 익숙할 나이에 머리에 깜찍한 빵모를 쓰고 다리가 훤희 드러나는 짧은 치마의 유니폼 차림과 상냥한 미소는 뭇 사내들뿐 아니라 같은 여성들에게도 문화적 쇼크였다.

한창 엄마에게 응석 부릴 나이에, 친구들이 대학 캠퍼스를 즐기고 있을때 이들은 고등학교 졸업장만 따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맨 몸, 맨 손'으로 도시로 상경해 버스를 탈 수 밖에 없던 '철 없는 다부진 소녀'들이었다.

당시 버스 회사의 취업 문턱도 낮았다. 증명사진 한장 붙인 이력서도 필요없이 '달랑' 면접만 보고 버스 안내양이 될수 있었다. 살짝 추가로 보는게 있었다면 '힘이 센' 체격을 선호했다. 거꾸로 생각하면 처우가 좋지 않으면 언제든 퇴사후 이직할 수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5-10년 정도 일한 버스 안내양의 평균 이직 경력은 3-5번 정도였고 20살에 시작해 28-29살에 그만둔 케이스가 대부분이었다.

어쨋든 그렇게 면접을 보고 들어간 버스 회사에 며칠간 견습 생활을 하면서 배운 암구호 "탕탕!-오라이~". 당시 ‘오라이’라는 말은 버스 안내양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하나의 상징적 단어였다.

1980년 중반의 버스 안내양의 모습.
1980년 중반의 버스 안내양의 모습.

‘오라이’도 규칙이 있었다. 출입문 옆을 손바닥으로 '탕탕!' 두번 두드리고 '오라이'하면 "승객이 모두 탔으니 출발해도 좋다"라는 뜻이고, '탕' 한번 치고 '오리이'를 하면 "멀리서 손님이 뛰어오고 있으니 멈추라"는 일종의 버스 기사와 안내양만의 수신호 였다. 그때 그시절에는 이런 정감이라도 있었는데, 요즘 버스기사들은 시간에 쫒기다 보니 코앞에서 손님을 보고도 '나몰라라' 인색하게 떠나 버린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시절 버스 안내양은 인간미가 '철철' 넘치는 승객의 편에 섰던 '착한 소녀'였던 것 같다.

요즘 1분도 기다려 주지 않는 현대 버스와는 달리 옛날 버스 안내양 덕분에 '인정 버스'에 올랐던 찾아볼 수 없었던 그시절만의 추억이 있었던 것이었다.

당시 '오라이-오라이' 발음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많은 연습을 했다는 버스 안내양. 어느정도 '오라이~'가 익숙해 질 무렵, 1980년대 '오라이'가 일본어라는 단어로 사용하지 말라는 권고가 나오자 대신 '정차' '발차'라는 용어를 사용하도록 했으나, 버스 안내양들은 정도 있고 더 익숙한 '오라이'를 계속 외쳐댔다.

버스 정거장에서 사람을 태울때 만차가 될때까지 '꽉꽉' 밀어 넣어야 했다. 그땐 손님을 많이 태워야 수입이 짭짤했기 때문이고, 무조건 많이 태우라는 지시도 있었다. 왜 면접시 힘 센 안내양을 주로 뽑았는지도 느껴지는 순간이다.

그러다 보니 안내양을 끌어내리고 타는 손님도 있었고 '힘 좋은' 아저씨가 손님들을 버스 안으로 밀어 넣어 준 웃지못할 진풍경도 발생했다. 이땐 손님들의 아우성 소리와 비명, 기사의 윽박지른 소리가 공존해 버스안이 떠들썩 했고 차가 줄발하면 '꿀렁-꿀렁' 기울며 넘어갈 듯, 말 듯한 채로 버스를 탓던 그때 그시절.

1980년대 초반의 버스 안내양의 모습
1980년대 초반의 버스 안내양의 모습

특히 버스 안내양 어깨에 크로스로 멘 '버스표 가방'이 귀여움을 더욱 발산했다. 이 가방속에는 손님들이 준 돈과, 회수권이 듬뿍 들어 있었다. 정거장에 도착시 새로운 손님을 맞이할땐 '어서오세요' 정도의 인사말을 건넸다. 반면 내릴때는 돈 받는게 급하다 보니 인사는 자연스럽게 생략됐다. 당시 '인사 보다 차비'가 더 중요했으니까.

가방 속 돈이 쌓이다 보니 이른바 '삥땅' 치는 버스 안내양도 적지 않았다. 이 돈으로 쉬는 날 목욕탕이나 밥값에 주로 사용했다. 당연히 월급은 생활비와 부모님께 용돈을 보내드린 '착한 효녀'들이었다. 당시 기숙사 생활인데도 노는 날에는 회사가 밥을 주지 않아 이른바 '삥땅 치기'가 암암리 허용 됐었다. 회사도 이를 이해하고 모른채 해줬다.

급기야 1989년 12월 30일, 자동차운수사업법 제33조 6항에 "대통령령이 정하는 여객자동차운송사업자는 교통부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안내원을 승무하게 하여야 한다."는 법 조항이 삭제되면서 버스 안내양은 대한민국에서 역사속으로 숨어 버렸다.

점점 디지털시대에 들어오자 '현금 대신 카드화'가 시작됨과 동시, 버스 안내양도 그리움과 함께 완전히 사라졌다. 현대 직장인은 버스 승차장에 정확한 시간에 나와, 버스에 올라 단말기에 대고 '삑'하며 버스 카드를 찍고 들어갈 때면 가끔 그시절 '추억의 버스 안내양'이 뇌리에 스쳐 지나가기도 한다. 그땐 그랬다.
/김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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