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독립운동가, 이옥-유원우 선생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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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독립운동가, 이옥-유원우 선생 선정
재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에서 핵심 간부 맡아 주도적으로 활동
  • 송승호 기자
  • 승인 2022.09.30 08: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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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투데이 세종=송승호 기자] 국가보훈처는 30일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재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에서 핵심 간부로 활동하고 동경지역 한국인 독립운동을 주도한 이옥-유원우 선생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학우회는 1912년 동경에서 창립된 유학생들의 민족항일 단체로, 학우회 잡지인 ‘학지광(學之光)’을 발간해 항일의식을 고취했으며, 특히 1919년 2월 8일 2·8독립운동을 주도했고, 이는 훗날 3·1운동의 도화선뿐만 아니라 1920년대 일본 유학생 운동의 밑거름이 됐다.

[사진=국가보훈처]
[사진=국가보훈처]

1895년 경북 안동 출생의 이옥 선생은 1919년 3·1운동 이후 안동지역의 유력가, 재산가, 학교 등을 조사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고하는 조사원으로 활동했다.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에서 유학하며 학우회 서무부장, 총무 등 주요 간부로 활동한 선생은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학살 만행을 목격하고 유학생들의 피해 상황을 조사·지원하기 위해 서울에 꾸려진 임시재경일본유학생회 상무위원에 선임됐다.

1924년 학우회뿐만 아니라 동경지역 독립운동을 주도해 일본 경찰이 요시찰인물 ‘을호’로 지정, 주요 감시와 경계 대상이 되기도 했다.

또한, 1924년 3월 동경의 조선인 학생, 청년, 노동단체가 연합으로 개최한 3·1운동 기념강연회에서의 발언 등으로 일본 경찰에 의해 검거된 후 조사를 받고 풀려났으며, 4월 서울에서 개최된 조선청년총동맹 창립대회에 학우회 대표로 참석했다.

1927년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창립대회 간사로 선임돼 활동했으며, 이후 신간회 경성지회 정기대회 대표회원 및 신간회 총무간사로도 맡은 소임을 다했다.

1901년 경북 상주 출생의 유원우 선생은 1920년 대구고등보통학교 재학 시, 일본 경찰의 부당한 폭력에 항거하는 동맹휴학을 주동한 혐의로 3개월 구금 후 퇴학당했다.

1927년 와세다대학에서 유학하며, 재동경조선인단체협의회 실행위원, 신간회 동경지회 초대 총무간사로 선임돼 일본 지역 독립운동 세력의 중심에 서 있었다.

선생은 1929년 일제 경찰이 학우회 간부 대부분을 검거하면서 학우회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각 학교 동창회 중심으로 학우회 조직을 개편, 대표로 선임돼 학우회의 재건을 위해 활동했다.

1931년 졸업 후 귀국한 선생은 상주교육협회를 조직하고 유치원을 설립하는 등 조선 미래세대 교육을 위해 노력했으며, 농촌지역의 경제개선과 농민 계몽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이옥-유원우 선생은 유학생으로서, 그리고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에는 전도유망한 지도자로서, 일본과 한국에서 독립과 민족을 위해 헌신했다.

정부는 선생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이옥 선생에게 2009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유원우 선생에게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송승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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