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그랬지: 옛날특집⑤보] "짤까닥! 짤까닥!" 가위친, 그리운 '엿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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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그랬지: 옛날특집⑤보] "짤까닥! 짤까닥!" 가위친, 그리운 '엿장수'
'비료포대' 들고 '엿' 바꿔먹은 어릴적 추억 '솔~솔"
  • 김민호 기자
  • 승인 2020.11.08 13: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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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짤까닥-짤까닥' 가위 치는 시골동네 엿장수의 구수한 소리.
고달픈 삶의 마음을 달콤한 '엿'으로 위로했던 시절.
그땐 그랬지...

[공공투데이 서울=김민호 기자] ‘짤까닥-짤까닥’ 엿장수(고물수집행상) 아저씨의 가위질 소리가 나면 동네 아이들이 골목 어귀로 쏟아져 나왔다. 시골 옛 동네에는 엿장수가 있었다. 가난이 당연했던 그 시절, 엿장수들은 하얀 분칠한 엿을 실은 손수레를 몰고 등장했다.

헐렁하고 네모난 엿가위로 연신 ‘짤까닥 짤까닥’ 소리를 내며 코흘리개들을 끌어모았다. 아이들은 빈 병이나 쇠붙이 비료포대 등을 들고 나와 엿과 바꿔먹었다.

요즘처럼 과자가 흔하지 않던 1980년대부터 1990년 사이에는 그야말로 '엿'이 최고의 간식이었다. 엿장수 아저씨는 빈병, 헌책, 찌그러진 양재기, 깨진 그릇 등 쓸모없는 폐품을 달콤한 엿으로 바꿔줬다.

이 당시 경합을 이룬 또다른 '반짝' 여름장수 '아이스깨끼'(아이스크림) 장사꾼이 나타났는데, 역시 아이들의 간식에 일등공신 했다. '아이스깨끼'는 또다른 별칭이 있었는데 '하드'라는 표현을 같이 써왔다. 이 하드는 색상별 오렌지, 연두, 바닐라 맛 등 다양했고 그 속에는 아무것도 없는 순수한 얼음으로만 만들어진 '아이스깨끼'였다.

지금 종류가 많아진 '각양각색'의 아이스크림 보다는 '딱' 한가지 밖에 선택할 수 없었던 그때 그시절 '아이스깨끼'를 골랐던 추억의 감성적 시대를 살았던 것이 어쩌면 더 좋았던 것 같다.

1980년 중반 엿을 가득 실은 손수레를 끈 엿장수가 동네 골목을 누비벼 엿을 팔았던 엿장수 모습.
1980년 중반 엿을 가득 실은 손수레를 끈 엿장수가 동네 골목을 누비벼 엿을 팔았던 엿장수 모습.

특히 '아이스께끼' 장사는 시골 벼·밭 농사에 사용됐던 비료를 담은 비닐 포장지인 이른바 '비료포대'를 제일 좋아했다. 대체 비료포대를 어디다 쓰려는 지는 당시도 몰랐고 지금도 모르겠다. 그땐 그저, 비료포대가 '돈'대신 아이스깨끼와 바꿔 먹을수 있다는 소중한 존재인 것만 알고 시골 '헛간'에 간직 해 왔을 뿐.

시골에서 다용도로 쓰인 비료포대는 할머니가 고추 딸때, 깨 담을때, 감자를 저장할 때, 그리고 겨울에 아이들 썰매탈때 요긴하게 쓰인 질긴 비닐 포장지였는데, 왜 아이스깨끼 아저씨는 이를 좋아했을까?

반면 '엿'장수 아저씨는 제일 좋아하는게 '철'이다. 철사나 농경지에 사용됐던 녹슨 철골, 오그라든 자전거 휠이나 철근 등 '철'이면 무엇이든 싹쓸이 해 갔다. 이 철들은 1근(600g)에 얼마씩 계산해 '엿'은 엿대로 주고 '빨래비누'는 빨래비누로 교환해 갈수 있었다. '엿'장수 아저씨 때문에 시골 골목길과 집 앞마당에 수북히 쌓인 쓰레기들이 없어져 속이 시원했다.

집에서 안 쓰는 물건들을 엿장수에게 갖다 주면 비슷한 양이라도 가위로 쳐서 잘라주는 엿가락의 양이 매번 달랐다. 그야말로 ‘엿장수 마음대로’ '엿'을 받았던 추억을 소환했다.

아저씨가 기분이 좋으면 길다랗게 쳐줬고, 때로는 야박하게 엿을 주기도 했다. 손수레에 인절미 떡처럼 펼처놓은 넓고 노란 엿에 머리가 넒은 까만 '평 끌'을 엿 위에 대고 가위로 '툭' 치면 엿 크기와 두께는 저절로 정해 떨어져 나온다. 이 때 엿장수 아저씨에게 말만 잘하면 한번 더 '툭' 쳐서 작게 튀어 나온 엿가락을 덤으로 얻을수도 있었다.

아이들의 조름에 엿장수는 쇠로 만든 끌을 대고 가위로 쳐서 엿을 더 얹어주기도 했다. 운이 좋으면 ‘똥비누’라고 불리던 빨랫비누를 받는 행운도 누렸다. 값어치는 역시 엿장수 마음이었다.

빈 병의 용도는 다양했다. 일 나간 남편을 기다리던 신혼 새댁 시절에는 도둑이 들까봐 무서워 창가에 소주병을 세워놓기도 했다. 꿀과 들기름, 호롱불 기름을 담는 용기로 변신하기도 했다.

엿장수가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반부터 동네 방문에 슬슬 뜸을 들이다 1990년대 초반에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이는 1985년 시작된 ‘빈 용기 보증금제도’ 영향이 컸다. 소주병 20원, 맥주병 30원이었다. 빈 병을 들고 동네 구멍가게를 찾아 군것질거리와 바꿔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러다 보니 '엿'장수의 일자리가 없어졌다.

빈 용기 보증금은 이후 1994년 40∼50원으로 인상됐다. 2000년대 들면서 분리수거가 일상화되고, 군것질거리와 바꿔먹기엔 턱없이 적은 보증금이다 보니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이때 자주오던 옛 동네 엿장수가 아예 발걸음을 멈췄다.

또다시 빈 용기 보조금이 다시 화제가 되고 2017년부터 각각 100원과 130원으로 인상됐다. 이 당시 동네 술을 좋아하는 동네 어르신들 마당에는 술병이 한가득 쌓였다. 이 병들은 쌀가마니 포대자루에 한 가마니, 두 가마니는 기본, 적당히 모아지만 동네 슈퍼로 가져가 다시 술을 교환해 오거나, 용돈벌이도 심심찮게 생겼다.

'엿' 장수도 더이상 해먹을 것이 없다보니 "공연을 하며 엿을 팔자"는 일종의 '품바' 공연이 한때 성행했다. 이제는 동네 작은 행사나 벚꽃 축제 등에서만 간간히 '품바 타령'을 하며 엿을 파는 모습을 볼수 있다.

축제 거리에 자리잡고 '거지 복장'과 볼에 '연지곤지'를 찍은 볼성 사나운 웃긴 품바들이 '품바 쇼'와 '재치 있는 입담'으로 사람을 끌어 모은뒤 2000원 씩 던져주면 대신, '엿' 한봉지를 제공했다. 맛은 손수레 끌며 비료포대와 바꿔먹던 그 '엿' 맛과는 달랐다. 

당시 '짤까닥-짤까닥' 치는 엿장수의 가위는 자르는 그 가위가 아닌, 집안에 있던 배가 고픈 아이들을 불러낸 정겨운 가위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짤까닥-짤까닥' 가위치는 그당시 동네에 울렸던 구수한 소리는 고달픈 삶을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달콤한 '엿'으로 위로해 준 가위 였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땐 그랬다.
/김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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