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그랬지: 옛날특집⑥보] 발등에 까만 '때'가 꼈던 '검정 고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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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그랬지: 옛날특집⑥보] 발등에 까만 '때'가 꼈던 '검정 고무신'
남자 친구가 고무신 거꾸로 신었던 추억
  • 김민호 기자
  • 승인 2020.11.22 11: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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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 고무신을 신고 보자기에 공책을 싼 '책보'를
어깨에 크로스로 메고 학교에 다녔던 시절.
그땐 그랬지...

[공공투데이 서울=김민호 기자] 2차 대전이 끝난 1946년과 1965년 사이에 출생한 베이비부머 세대에는 '검정 고무신'에 얽힌 추억 하나 씩은 간직하고 있다. 어린 시절 활짝 핀 노란 개나리 꽃을 예쁘게 그린 검정 고무신을 신고 싶어 초등학교(옛 국민학교)에 가서, 친구들과 부모님 몰래 신발을 바꿔 신고 다닌 적도 많았다. 이 해 센스가 좀 있는 또래 친구들은 아무 무늬가 없는 밋밋한 검정고무신에 연꽃, 모란동백, 불두화, 패랭이꽃, 동자꽃 등을 예쁘게 그려 신고 다닌적이 많았다.

이를 보고 마음에 들어하는 지인들이 많아지자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려 팔았던 추억도 제법 있다. 가난 했지만 마음만은 넉넉한 부자였던 어린 시절에는 검정 고무신과 믹스매치 했던 보자기에 공책과 학용품을 싼 이른바 '책보'를 어깨에 크로스로 멘 모습으로 초등학교를 다녔던 그때 그시절.

다들 가난 하면서도 소박한 가족과 친구들이 있어 마냥 즐거워 했던 어린 시절이 그리워질 때가 가끔 있다. 학교가 끝나고 나면 오후 2시, 집에 돌아올때 검정고무신과 땀이 번지면서 발등에 'U'자 형태로 까만 때가 낀 모습이 저절로 그려진다. 이럴때면 처마 밑에 아껴 뒀던 다른 검정 고무신을 갈아 신고 아버지가 새벽에 풀밭에 메어 놓은 '소 풀 먹이기'를 하러 갔고 겨울이면 외양간에 소 여물을 주기 위해 '쇠죽 쑤기' 등을 매일 같이 했다. 또 아버지의 지게를 지고 들풀을 뜯어 2다발을 메고 검정 고무신을 질질 끌면서 해질 무렵에 돌아온 추억도 새록새록 하다.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에 있었던 국제화학 신발 제조 작업장의 1965년 모습이다. 국제화학은 부산 지역에서 성장한 대표적인 신발 제조업체로 국제화학을 모태로 국제그룹이 탄생하였으나, 1980년대 해체되었다.
부산 동구 초량동 고무신 대표기업으로 성장한 국제화학 신발 제조 작업장의 1965년 모습, 이후 1980년대 해체됐다.

 

이렇게 학교와 가사일을 병행할 경우 발뒤굼치가 까져 아팠고 여름 날 맨발로 신고 일하다 보면 발등에 새까맣게 때가 껴서  동네 여자 친구들에게 부끄럽기 까지 했다. 물이 들어가면 미끈거려 걷기 불편했고 자갈밭을 걸으면 '쿠션'이 전혀 없어 아프고 통증이 심했다.

좋은 점도 있었다. 어릴적 개울가에서 검정 고무신은 어망이자 어항이었는데 신발속에 물을 넣고 냇가에 잡은 작은 송사리 1-2마리를 담아 보관 하기도 했고 이를 이용해 잡기도 했다. 혹여 물고기가 죽을까바 검정 고무신에 담아 동네 골목을 맨발로 집까지 걸어 오곤 했다. 물이 흐르는 개울을 건널때 가끔 신발이 '훌렁' 벗겨져 떠내려간 신발을 잡느라고 애를 먹이기도 했지만.
  
젊은 꽃다운 아기씨들에게는 강력한 무기로도 변했다. 남자 친구가 바람을 피울때 '고무신 거꾸로 신었냐?'는 말과 함께 고무신 한쪽을 벗어 따귀를 날릴때 가장 후련했다. 더 좋았던 기억은 겨울철 동네 골목 빙판길에 검정 고무신은 그야말로 최고의 썰매이자 스키였다. 당시 짚푸라기를 넣어 쿠션을 만든 '비료포대 썰매'가 검정 고무신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다. 동네 아이들이 삼삼오오 검정 고무신, 비료포대를 가져와 동네 골목에 빙판을 만들어 미끄럼을 즐겼던 추억이 아련하다.

이를 공감이라도 하듯 이달 19일 60-70년대 검정고무신 생활상을 그린 '추억의 검정 고무신'이 극장판 영화로 개봉했다. 이 영화는 지금과 다른 교과서에서만 볼수 있었던 지난 추억을 되살리는 다양한 소재들이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마을마다 공동으로 사용한 우물의 등장은 요즘 찾아 볼수 없는 다소 파격적인 소재였다. 이 해 검정고무신과 주룸 잡던 1960년대부터 1970년대 함께 첫 등장한 신발이 운동화 였다. 이 작품속 할머니가 운동화를 사 줬다고 애지중지 하는 기영이의 모습은 고급 신발이었던 고무신이 대중적인 신발이었다는 의미를 상징했다.

이는 소시민의 상징이자 누구나 신고 다녔던 고무신은 정겨운 느낌과 운동화에 대한 열망을 품었던 때를 떠올리게 만들어 우리나라 베이비부머 세대와 이를 겪지 못한 자녀 세대들 사이에서 공감을 이끌어 냈다. 사실은 가마솥도 같이 등장 하고 있지만 요즘도 흔하다 보니 이 내용은 담지 않았다.

1970년 초반에 운동화가 많이 보급되면서 점차 고무신은 역사속으로 사라져 갔다. '운동화 살 돈이 없어서' 1년에 검정 고무신 2켤레면 충분 했던 당시의 소박한 삶은 요즘 찾아 볼수 없는 또다른 배부름 이었다. 그땐 그랬다.
/김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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