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특집] 기억하자 '한국전쟁'···6.25 7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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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특집] 기억하자 '한국전쟁'···6.25 70주년
비극의 시작
승리자 없는 전쟁
전쟁이 남긴 상처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전쟁
전쟁은 끝났으나···
  • 유성원 기자
  • 승인 2020.06.25 08: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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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투데이 서울=유성원 기자] 6월 25일, 오늘이 바로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70주년이 되는 날이다. 본지는 이날 근현대사 교과서에 기록된 역사를 바탕으로 6.25를 돌아보는 마음으로 '기억하자 한국전쟁-6.25 70주년' 이라는 제목의 특집을 실었다. 많은 이들이 이날을 기억하며 6.25 당시 상황을 기억해 주길 바라는 뜻에서 6.25 당시 처참한 전투 상황부터 자유를 얻은 정전까지의 과정을 정리해 보도한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남침을 개시한 북한공산군은 27일 저녁에는 전차를 앞세우고 서울 외곽을 압박하자 한강교 폭파
1950년 6월 25일 새벽 남침을 개시한 북한공산군은 27일 저녁에는 전차를 앞세우고 서울 외곽을 압박하자 한강교 폭파

# 비극의 시작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인민군이 38도선 전역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그간 38도선 부근에서 종종 발생하였던 크고 작은 군사 충돌이 아니라 인민군의 전면적인 공격이었다. 전투가 시작된 지 사흘 만에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됐다.

전쟁은 이미 예고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38도선 이남과 이북의 분단 정부가 서로의 체제를 반국가 단체로 규정하고, 각각 북진 통일과 국토 완정(남진 통일)을 주장하며 군사 충돌도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52년 1월 폭격을 받은 서울 도심의 모습
1952년 1월 폭격을 받은 서울 도심의 모습

전면전을 준비한 쪽은 북한이다.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도움을 얻어 빠르게 군사력을 키워, 남한보다 군사력에서 앞섰다. 게다가 북한 지도부는 '남조선 해방'에 대한 북한 주민의 열기가 높고, 남한 정부에 대한 남한 국민의 지지는 낮다고 생각했다.

북한은 한반도의 주변 상황도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1949년 한 해 동안 미군이 한국에서 모두 철수한 데다가 중국 공산당이 중국 전체를 장악하였고, 소련이 원자 폭탄을 개발하는 일이 잇달았던 것이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1950년 4월과 5월에 소련과 중국을 차례로 방문하여 자신감을 내비치며 전쟁 의사를 밝히고, 두 나라로부터 지원 약속을 이끌어 냈다. 전쟁은 이렇게 시작됐다.


 

1950년 7월 대전 시가에 진입한 북한군 탱크부대
1950년 7월 대전 시가에 진입한 북한군 탱크부대

# 승리자 없는 전쟁

전쟁은 준비된 인민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시작됐다. 그러나 참전하지 않을 것으로 북한이 예상한 미국이 즉각 전쟁에 개입했다. 6월 27일 미 공군의 참전을 시작으로,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일본에 있던 육군도 한국에 상륙하였다. 미국을 중심으로 16개국이 참여한 국제 연합(유엔)군도 참전했다.

유엔군의 대규모 개입에도 불구하고 인민군은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1950년 8월에는 국군과 유엔군을 낙동강 이남으로 밀어붙여 이남 지역 대부분을 장악하였을 정도였다. 전세는 9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급격히 변화하였다. 9월 15일, 유엔군은 인천에 대규모 군대를 상륙시킨 다음 인민군을 전면 공격했다. 반도의 허리를 가르고 들어온 유엔군에게 남과 북 양쪽에서 포위된 인민군은 급격히 무너졌고, 이제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비롯한 이북 지역 대부분을 장악했다.

1951년 6월 4일 거제 포로수용소 빨래터에서 만난 어린 전쟁포로의 모습
1951년 6월 4일 거제 포로수용소 빨래터에서 만난 어린 전쟁포로의 모습

10월 13일에는 중국 공산당이 전쟁 참여를 공식 결정하였다. 전쟁이 이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양 진영 간의 정면 대결로 비화한 것이다. 국군과 유엔군은 중국군에게 밀려 큰 피해를 입고 한강 남쪽으로 후퇴하였다. 1951년 1월, 서울 거리에는 다시 북한의 인공기가 휘날렸다.

그러나 1월 말에 국군과 유엔군이 다시 반격을 개시하면서, 전쟁은 양측이 38도선 부근에서 밀고 밀리는 지리한 공방전 양상을 띠게 되었다. 1951년 6월 23일에 소련이 유엔 대표를 통해 휴전을 제의하자, 미국이 이를 받아들여 7월에는 본격적인 정전 협상이 시작됐다.

1950년 12월29일 대구에서 기차에 올라 피란길에 나선 시민의 모습
1950년 12월29일 대구에서 기차에 올라 피란길에 나선 시민의 모습

# 전쟁이 남긴 상처

인민군이 남침을 시작했을 때 국군과 경찰은 이들과 협력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감옥에 갇혀 있던 재소자와 보도 연맹원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했다. 인민군도 새로 점령한 지역에서 이른바 반동 분자(북한이 사회주의 개혁을 추진하면서 청산 대상으로 삼은 사람들을 일컫는 말)를 색출하여 공공연하게 처형했다.

전선이 자주 이동함에 따라 학살이 일상화됐다. 국군이 점령할 때는 인민군에 협력한 사람들이 보복을 당했고, 다시 인민군이 점령하면 반대의 일이 일어났다. 빨치산이 활동하던 지역에서도 빨치산과 토벌대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자주 일어났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군대에 동원됐다. 많은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으며, 일생 전쟁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할 부상자도 속출했다. 수많은 어린이들이 전쟁 고아가 되었고, 가족과 흩어진 이산 가족이 무려 1,000만 명을 넘어섰다. 경제적인 피해 규모도 천문학적이다. 국토는 황폐화되고 산업 시설 대부분이 파괴됐다. 도로와 주택, 철도와 항만 시설 파괴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때 상륙정을 타고 월미도로 진격하는 미 해병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때 상륙정을 타고 월미도로 진격하는 미 해병

#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전쟁

1948년 당시 한국과 북한은 각각 민주 공화국과 인민 공화국을 내걸고 민주주의 실천을 다짐했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면서 남북 모두 민주주의는 크게 후퇴하고 말았다. 한국에서는 독재자가 자신의 권력 연장을 위해 헌법 개정을 강요한 첫 번째 사건이 일어났다. 이승만은 국회 의원들에 의한 간접 선거 방식으로는 대통령에 재당선될 가능성이 없자, 1952년에 임기 만료를 앞두고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는 방식(대통령 직선제)으로 헌법을 개정하려 했다.

1950년 9월 15일 월미도를 수비하던 인민군이 백기를 들고 투항
1950년 9월 15일 월미도를 수비하던 인민군이 백기를 들고 투항

이에 국회는 이승만의 개정안(제1차 헌법 개정, 1952. 7)을 반대하고 대통령제에서 내각 책임제로 정부 형태를 바꾸는 헌법 개정안을 제출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국회 의원 10명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구속하고, 군대와 경찰, 우익 청년 단체 등을 동원하여 국회 의원들을 위협하며 강제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권력이 더욱 강화됐다. 전쟁 직후 조선 독립 동맹을 이끌었던 인사들의 일부가 권력에서 밀려났으며, 박헌영, 이승엽 등 남로당 출신의 당 간부들이 대부분 체포됐다. 이들에게는 전쟁을 잘못 이끌었다거나, 정권 전복 음모를 꾀했다거나, 미국의 간첩 노릇을 하였다는 등의 죄목이 붙었고, 많은 사람이 처형됐다.

1950년 12월 혹한 속에 철수하던 미 해군부대가 장진호 부근
1950년 12월 혹한 속에 철수하던 미 해군부대가 장진호 부근

# 전쟁은 끝났으나...
전쟁은 1951년에 마무리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정전 협상은 오래 끌었고, 그 사이에도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협상이 길어진 가장 큰 이유는 포로 송환 문제였다. 공산군 측은 "포로는 적극적 적대 행위가 종료된 후 지체 없이 석방하고 송환하여야 한다."는 포로 대우에 관한 제네바 협정(1949. 8. 12.) 118조를 내세워 양측 포로의 무조건 송환을 요구했다.

1950년 10월 20일 평남 숙천 주민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미 187공정대원을 환영​
1950년 10월 20일 평남 숙천 주민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미 187공정대원을 환영​

유엔군 측은 "포로의 자유 의사에 따르자."며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불이익을 받아선 안 된다는 제네바 협정의 또 다른 조항을 근거로 내세웠다. 인민군이든 국군이든 전쟁 중에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강제로 징집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결국 양측은 포로의 자유 의사에 따른 송환에 합의했다.

1953년 7월 27일, 드디어 미국과 북한-중국 대표가 정전 협정에 서명하였다. 한국 정부는 북진 통일을 고집하며 서명을 거부하고 맞섰으나, 전쟁이 멈춘 것은 분명했다. 정전이 일시적인 휴전에 그칠지, 정치 협상을 통한 평화 체제의 수립으로 이어질지는 90일 이내에 열릴 정치 협상에서 결정하기로 됐다. 당시 정전이 아닌 영구적인 평화를 위해 남북한은 무엇을 해야 했을까?

/유성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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